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열광하고, 또 분노하는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군대, 서울대 그리고 영어다.
나만 이렇게 당할 수는 없지!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초성게임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연예인 이름!” 하면서 “ㅅㅌㅂㅅㅈㅇ” 를 외쳤다. 정답을 알겠는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당신, 하지만 그 당시 이 문제를 들었다면 아마 5초도 안되서 이 문제를 풀었을 것이다. 정답은 “스티브 승준유”이다.
유승준. 1997년 ‘가위’로 데뷔하여 ‘나나나’, ‘열정’, ‘찾길 바래’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던 유승준의 당시 인기는 정말 하늘을 찔렀었다. 하지만 2002년 병역 의무를 피해 미국으로 귀화한 유승준의 인생은 그 날로 훅 갔다. 정말 훅 갔다. 현재까지 그는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는 자(출입국관리법 11조 3항)’로 분류되어 대한민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강남역에 폭탄을 설치하겠다는 테러리스트도, 독도에 일장기를 꼽겠다고 하는 일본의 극우자도 아닌 그가 무려 12년간 모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말 한마디로 15년간 군만두만 먹어야 했던 오대수와 부둥켜안고 눈물 한 바가지 쏟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우리가 병역의 의무에 대해 가지는 분노는 실로 엄청나다.
꼴에 서울대를 나왔다고?
아마 다들 ‘서울대 출신 가수 OOO,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와 같은 기사를 클릭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신인그룹의 멤버 OOO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도 그 글들을 클릭하고 말았다. ‘서울대’라는 단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자극적이고, 매혹적이며, 선정적 단어들 가운데 하나다.
단지 기사 클릭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든든한 학력 한 줄은 우리에게 피나는 노력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선물한다. 반면 내세울 것 없는 학력은 취업에서건, 진급에서건, 결혼에서건, 씻을 수 없는 원죄와 같은 주홍글씨를 새겨준다. 그래서 이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무지막지한 분노를 쏟아낸다. (역린: 용의 턱 아래 비늘, 큰 노여움 혹은 임금의 노여움을 의미.)
‘병역비리 연예인’만큼이나 공분을 사는 이들이 바로 ‘학력위조 연예인’인 것이다.
2007년, 우리는 한 여성의 학력위조에 대해 신드롬에 가까운 경악과 분노를 보냈었다. 바로 신정아 학력위조 파문이다. 캔자스대에서 학사와 석사학위, 그리고 2005년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술관 큐레이터로 활약하며 일약 ‘미술계의 신데렐라’로 불렸던 그는 학력이 캔자스대 학부과정 중퇴뿐인 것으로 밝혀져 많은 이들에게 공분을 샀다.
이 사건에서 놀라웠던 점은: 1) 그녀는 본인이 예일대 졸업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 2) 위조가 밝혀지기 전까지 그녀의 학력과 미모는 실제 그녀의 능력을 덮을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 3) 그리고 한 여성의 학력위조에 대해 엄청난 양의 기사와 뉴스가 쏟아졌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학력’은 그렇게 본인도 거짓을 진실로 믿게 하고, 사람들도 그 사람을 이유 없이 우러러보게 하며, 거짓으로 드러날 경우에는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일으킨다. 우리 사회에서 ‘학력’은 정말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니 이를 무상 취득한 이들에겐 엄청난 응징이 쏟아지는 것이다.
어머니, 왜 저를 미국에서 낳지 않으셨나요?
한 달에도 몇십 개의 ‘OOO, 유창한 영어 실력 화제’란 제목의 뉴스들을 본다. 이런 기사들을 클릭할 때 나는 ‘그래,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클릭하면서도, 잘하면 잘하는 대로 ‘외국에 살다 왔으니 잘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라며, 못하면 못하는 대로 ‘도대체 어디가 잘한다는 거야? 이렇게 기삿거리가 없나?’라며 빈정거림으로 나 스스로 자위한다.
사실 세상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다. 굳이 내가 어떤 연예인이 영어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기사까지 읽으면서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기사를 양산하고 또 소비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영어’는 아픈 추억이 깃든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유도 모른 채 영어에 필요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왔고, 부족한 영어 성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감수해왔다. 그렇기에 이런 부조리에 관한 분노가 내면 깊이 누적된 것이다.
‘군대’ ‘서울대’ ‘영어’ 그 안에 깃든 억울함과 분노
우리나라 국민이 유난히 발끈하는 군대, 서울대, 영어와 같은 이슈들을 들여다보면 공통으로 내재한 속성이 있다. 바로 ‘억울함’이다.
누가 젊고 꿈 많은 나이에 2년이란 시간을 군대에서 보내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대한민국 남성은 대부분 그래야만 했었다. 해야 할 일이고,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의무라 생각하며 스스로 납득시켰으리라. 그래도 ‘다시 군대 가는 꿈’을 꿀 만큼이나 답답하고 암울했던 기억은 잊히질 않는다.
학력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수능 한 번 잘못 봤다는 이유로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깊이 차별받아 왔던가?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나는 평생 “OO대학 출신의 누구”로 살아가야 했고, 어느새 나 역시도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어느 학교 나왔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묻는다. 그런데 그 주홍글씨를 거짓말 몇 마디로 도려낸다? 내가 ‘딱졸’(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을 지칭하는 은어)이라도 그건 참을 수 없지!
영어에 대해서도 굳이 많은 이야기가 필요 없다. ‘내가 만약 어린 시절 영어권에서 살았었다면 영어에 투자했던 이 시간을 다른 곳에 쓸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아마 대부분 한 번쯤 가져봤을 거다. 국사학과 학생도 토익책과 씨름을 해야 하는 현실. 무한대의 시간을 투자해도 외국에서 자란 꼬맹이보다 영어를 못하는 현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 난감하다.
‘영어 없이도 내 분야에서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사회는 왜 그리 높은 영어성적을 요구하나? 왜 영어성적으로 나를 재단하려 하려고 하나? 그들의 기준에 맞추려 빼앗긴 나의 소중한 시간은 누가 돌려주나? 억울함을 넘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정상적 분노, 비정상적인 사회의 비합리성
우리는 그동안 우리 안에 분노가 있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왔다. 그 분노의 뿌리인 사회구조의 비합리성에 대해서 고민했을 리 만무하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끔 나오는 이들 기사에 댓글로 열폭(열등감 폭발)하는 것, 그리고 다시 도서관에 처박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책 앞에 신세를 한탄하는 것뿐이었다.
이제껏 군대, 학력, 영어가 이 사회에 쌓아왔던 거대한 분노만으로도 이미 유죄다. 이젠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나는 징집제도 자체를 부정하거나 학력, 영어의 무용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명한 것들이 있다.
높은 분 자제와 보통 집 아들을 현재의 징집제도는 차별한다. 학력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재수, 학력 연장 등의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그리고 불필요한 영어 공부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빼앗긴다. 이 세 가지를 근본에서 개혁하지 않으면영원히 대한민국에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나는 안다, 내가 그저 운 좋은 녀석이었다는 걸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교육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교육은 더 이상 ‘개천용’의 신화를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교육은 그 유일한 탈출구를 가로막는 수단이 돼버렸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보다 훨씬 쉽게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 교육을 통해 가난과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한다.
내 이야기를 해보자. 나 역시 그렇게 혜택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나는 내 노력과는 상관없는 꽤 괜찮은 유전자, 환경을 부여받았다. 그렇게 ‘서울대’라는 좋은 대입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20대까지의 성취는 모두 내 부모님과 환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이런 나에게 ‘공부 참 열심히 했구나’ 칭찬하면 참 부끄럽다.
내가 수능을 잘 본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그 한 번의 대박으로 정말 오랜 세월 편하게 살았다. 남들이 무거운 짐처럼 입대를 걱정할 때도 나는 대기업에서 좋은 연봉 받으며 병역특례로 그 의무를 대체할 수 있었다. 힘들다는 취업 역시 그룹 스터디 준비 한 번 없이 서류와 면접만으로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생활에서는 굳이 나를 알리지 않아도 ‘저 사람 서울대 사람이야’라는 부당한 후광을 등에 업었다. 가끔 철없이 독특한 짓을 할 때도 ‘역시 수재는 달라’, 믿기 힘든 평가를 듣기도 했다.
나는 안다, 열정은 언젠가는 운을 넘어선다는 걸
하지만 이제는 하나 더 아는 게 생겼다. 나에게 아무런 노력 없이 부여된 운과 그 운 덕분에 별걱정 없이 살았던 10년이 열정과 노력으로 끝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미 역전된 지 오래라는 것을.
다양한 분야에서 열정을 불사르는 그들의 가치는 정말 빛나는 보석들이었다. 내가 이유 없이 받은 이로움 만큼이나 어느 곳에서는 부당히 핍박받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억울한 일이다. 분노할 일이다. 개인적인 분노가 아니라 사회적 공분이 필요한 일이다.
모든 서울대 출신들이 노력 없이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끊임없이 노력해서 더 훌륭한 성취를 이루는 선후배들을 봐 왔다. 나는 다만 ‘학벌에 의한 편견은 사라져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과거의 나, 청소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단지 중고등학교 몇 년의 성적을 잘 못 받았다고 해서 꼭 남은 몇십 년의 인생을 망친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란다. 언젠가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 말이 그저 허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서울대와 영어가 부여하는 부당한 편익과 이에 따른 억울함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이 글은 필자가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글 입니다. 슬로우뉴스도 많은 사랑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lownews.kr/author/terry-t-um)
* 제 글은 RSS로도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http://t-robotics.blogspot.kr/feeds/posts/default
facebook page: http://facebook.com/trobotics
댓글 없음:
댓글 쓰기